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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피플 존, 정이현

연말연시는 참 설레는 시기였다. 한동안 매주 두세 편씩 넷플릭스에 업로드되는 <흑백요리사 2>를 기다리며 살았다. 연초가 지나가니 벌써 아득하다. 그 시절 나는 짝사랑할 때 그리워만 할 수 없어 상대의 흔적을 찾듯이, <흑백요리사> 주변의 온갖 정보와 자료를 수집하며 초조함을 다스렸었다.
뜨거운 가슴과 달리 비슷한 시기에 차가운 책을 만났다. 소설집 <노 피플 존>은 평범하게 무력하고 평범하게 주변부에 있는 보통 사람들에게 입에 발린 말을 해주지 않는 작품이었다. 헛된 희망을 주지 않는 작품의 정서가 <흑백요리사>로 비이성적으로 달궈진 나에게 온도조절장치가 되었다.
탐닉하던 자료와 읽던 책이 충돌하던 그 무렵, 김소희 셰프의 미슐랭 스타 관련 인터뷰가 머릿속을 자주 채웠다. <마스터 셰프 코리아>의 심사위원이던 그였다. 몰랐는데 그가 미슐랭 스타를 거부했던 적이 있었나 보다. 노벨상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던데 세상엔 좋은 것도 마다하는 이들이 종종 등장한다. 왜 미슐랭 스타를 거부했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처음엔 가슴이 뛰었지만, 곧 서글퍼졌다고 답했다. 잠시 다녀간 평가단의 코멘트와 별 하나에 한 업장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의문이 일었단다. 매일 17~18시간을 일하는 성실한 이들도 사람인지라 늘 완벽할 수는 없다. 누군가는 가족과 싸웠을 수도, 컨디션 난조를 겪을 수도 있다. 그런 지난한 삶의 시간들이 타인의 손끝에 달렸다는 사실이 슬프다는 말이었다. 결국 미슐랭도 ’장사‘의 일종이 아니냐는 일갈과 함께.
소설집 속 인물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끊임없이 타인을 측정하고 분류하며 선을 긋는다. 반대편에서는 그어진 선을 넘나들기 위해 기를 쓰거나 주변부를 서성인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심지어 가정 안에서도 마주친 이웃이 내 ’안전한 울타리‘에 적합한 사람인지, 아니면 배제해야 할 ’이물질‘인지 찰나의 순간에 판별한다. 그 판별의 기준은 나의 ’쾌적함‘이다. <실패담 크루>에서처럼 울타리 안이 따분해질 때면, <언니>에서처럼 울타리 안에 궂은일을 맡아줄 사람이 없을 때면 가끔 문을 열어주지만, 알고 보면 정문이 아닌 뒷문이라는 걸 알아차리게 된다. 타인의 고단한 사정이나 전후 맥락은 소거된 채, 당장 내 눈앞에 보이는 불편함만이 울타리를 넘나들 유일한 평가 기준이 된다. 마치 식당의 1년을 단 한 끼의 식사로 재단하듯, 소설 속 인물들은 타인의 인생을 단편적인 장면으로 소모하며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에 급급하다.
쿠팡의 개인정보 유출 사태가 여전히 뉴스에 종종 등장하는 걸 보니 아직 해결이 안 된 모양이다. 과로와 각종 사고로 사람들이 우수수 죽어나갈 때에도 굳건하던 쿠팡은, 우리 집 주소와 비밀번호가 털렸다는 소식에 탈팡 폭격을 맞았다. 사건의 무게보다 나에게 미치는 영향이 클 때 더 격렬히 반응하는 나의 ‘동물성‘, 힘이 없다고 판단되면 조금은 부당해도 된다고 믿는 사회적 매연이 매캐하다.
작가의 말에서 저자는 “기왕 실이라면 제가 쓰는 소설이 치실에 가까웠으면 좋겠습니다. 보이지 않는 틈새에 숨겨진 것을 기어이 끄집어내겠다는 목적으로 성실하게 움직이는, 얇고 매끄럽고 실용적인.”이라고 말한다. 책을 읽고 요리 대전을 보는 동안, 왜 어떤 사건들이 종종 머릿속에서 나란히 흘렀는지 나는 아직 치실처럼 성실하고 정교하지 못하기 때문에 모르겠다. 그저 잘 보여야 하는 사람에게는 작은 은혜에도 크게 감사하고 너그러우면서, 반대의 경우에는 점수표를 촘촘히 들이대며 틀린 점과 모순을 어떻게든 발견하려는 집요함이 내게도 있어서 오싹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