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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미티 국립공원에서, 쏟아지는 별을 보며 당신에게

통신이 잘 닿지 않아 소식이 늦었어요. 요즘같이 추운 겨울엔 여름이, 무더위엔 지나버린 봄과 다가올 가을이 그리운 당신이라면 하루만으로도 봄, 여름, 가을, 겨울 모두를 만날 수 있는 이곳, 12월의 요세미티 국립공원을 추천해 드립니다. 맞아요. 스티브 잡스가 사랑했던, 당신의 노트북 배경으로 쓰이는 그 요세미티요. 이 곳에서 결혼식을 열었다고도 하는데 그래서인지 드문드문 웨딩촬영 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120번 도로를 타고 3시간가량을 달리자 세상과 대자연 사이의 경계에 도달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경계의 출발 앞에서 문학사에 길이 남을 첫 문장을 썼다면 저는 세상의 때를 벗지 못하였으니 이렇게 말하겠어요. 모든 좋은 것 앞에는 입장료가 따른다고요. 35불을 결제하고 한 시간가량을 더 달렸습니다. 굽이치는 산등성이를 오르며 호기롭게 자연을 구경하려던 마음이 쪼그라들었습니다. 존외로 전환되는 순간이었어요. 우측으로 난 협곡을 보호막 없이 맨몸으로 달리려니 속력을 줄일 수밖에요.
4시간이 넘는 긴 주행은 처음이었지만 놀랍게도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200마일가량의 노정에는 캘리포니아 특유의 지중해성 기후와 사막지대, 목초지, 들꽃, 낙엽과 단풍 그리고 침엽수의 한쪽 어깨에 걸려있던 눈 뭉치가 바람의 등쌀에 못 이겨 후두둑 떨어지는 빙판길 모두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5000피트를 넘어섰다는 표지판을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튜브 뮤직에서 흘러나오던 음악이 멈췄습니다. 라디오로 전환해야 할 때인가 봅니다. 출발하기 전날 밤 호텔에서 구글 오프라인 지도를 다운 받아둔 건 신의 한 수였어요. 어떤 포인트들을 둘러볼지도 계획하지 않았거든요. 당신도 아시다시피 제가 좀 대책이 없잖아요. 숙소에서 실 가닥처럼 느린 신호를 잡아 구글맵에 별을 더디게 찍어야만 했습니다.
석양이 비치는 Mirror Lake의 모습은 한동안 제 가슴에도 거울처럼 재생될 것 같습니다. 해가 저무는 4시부터 약 45분가량밖에 볼 수 없는 낯이라 더욱 귀합니다. Half Dome의 머리가 퇴근하는 해님의 마지막 타는 빛을 은은하게 받아 황금빛으로 반짝이는데 잔잔하고 얕은 호수가 이 모습을 그대로 복사하는 것입니다. 다음날도 이곳저곳에 잠시 정차하여 풍광을 눈에 담는데 가만보니 모든 포인트가 이 Half Dome과 El Capitan의 요모조모를 보기 위한 가이드입니다. 자고로 아름다운 것은 정면으로도, 측면으로도, 코앞에서도 또 저 멀리서 무리에 섞인 모습으로도 그 태를 보고 싶은 겁니다. Mirror Lake는 직시로도 부족해 수면을 통한 재해석을 감상하기 위한 거였으니 미감을 향한 인간의 탐닉은 참으로 지독하지요.
오늘 낮에는 소변을 참느라 혼이 났습니다. 깊은 산속은 베이스캠프와 멀어지면 먹을 것도, 화장실도 찾기 어렵습니다. Tuolumne Grove로 진입하는 Tioga Road 초입에서 운 좋게 화장실을 만났어요. 변기가 아무런 배수 시설 없이 눈 위에 지어져 있었습니다. 굳이 아래를 내려다보지는 않았어요. 차가운 기온 때문인지, 자연의 위대함 때문인지, 인간의 관리의 위대함 때문인지 어쨌든 어떤 위대함 덕분에 그 어떤 악취도 없었습니다. 재밌는 건 화장실 내에 거품 비누는 비치되어 있지만 수도꼭지는 없었답니다. 거품을 손바닥에 덜고 밖으로 나와 눈을 한 움큼 쥐었습니다. 까끌거리는 눈과 얼음의 감촉을 느끼며 두 손을 맞대어 비비자 눈은 체온에 녹아 비눗물을 씻고 갔습니다. 이 차가운 상쾌함이란!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작은 등반을 했어요. 누군가 밟고 간 자국이 있어 그 발길을 따랐습니다. 저도 누군가에게 길을 안내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자주 의심하면서 또 희망해봅니다. 햇살은 정직하게 목표로 삼은 소나무의 한쪽 어깨에만 눈을 남겼습니다. 바위틈에서도 나무는 뿌리를 내려 바닥을 꽉 움켜쥡니다. 쏟아지는 이 곳의 별 무리를 당신도 보면 좋을 텐데, 사진에 담기지 않아요. 당신이 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