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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의 아이가 무럭무럭 자란다

신은 내가 놀고만 있는 꼴을 절대 못 보는 게 분명하다. 신을 믿지 않지만 신이 인간에게 친구를 내려준 이유는 혼자 있으면 시간이 가고 있다는 걸 잊고 태평하게 지낼까 봐 염려해서가 아닐까 의심한다. 요즘 들어 부쩍 나이가 차곡차곡 쌓이고 있음을 느낀다. 오롯이 혼자일 때 나는 내 나이를 종종 잊는다. 홀로만 놓고 보면 날마다 비슷하게 보내기 때문이다. 개를 돌보고, 짬짬이 수다를 떨고, 일을 하고, 산책을 나서고, 다시 개를 돌보고, 짬짬이 수다를 떨고, 일을 하고, 산책을 나서고.
3년 전부터 평이했던 일상에 친구들의 아이가 추가되면서 시계와 달력을 보기 시작했다. 매일 수다를 떨던 친구들이 출산을 하면서 자연스레 대화 주제에 육아가 등장했다. 눈에 들어오는 풍경도 격변했다. 네 명의 성인이 겨우 한 사람을 만든다고 하는 인구 절벽 시대에 나는 온 세상이 아이로 가득 채워진 것 같은 착각을 한다. 감정적 거리와 영향력이 비례하는 덕이다. 자주 보는 친구들의 아이가 세 살이 되자, 인구 구조에서 세 살배기 아이가 가장 볼록할 거라고 믿는 요즘이다.
친구들이 사람을 만드는 동안 나는 작은 서비스 하나 완성하지 못했다는 열패감보다 시간의 유속을 체감하게 하는 건 아이들이 콩나물처럼 무럭무럭 자라는 모습을 지켜볼 때이다. 누워서 손 발을 꼬물대는 게 전부였던 갓난쟁이는 기고, 낯을 가리고, 걷고, 뛰더니 요즘은 급기야 말을 한다.
“온도니(엉덩이) 이모”
“바어린(바이올린) 이모”
“내가 이로케 해떠”
어떻게 그 많은 것들을 이렇게 단숨에 배웠나 싶다가도 단 하나의 과정도 뛰어넘지 않고 차곡차곡 정직하게 쌓아간다는 데 경외를 느낀다. 그리고 그 옆에는 나의 친구들이 있었을 것이다.
누워있던 사람을 걷게 만들고, 가진 언어라고는 ‘응애’ 뿐이던 이에게 말을 할 수 있게 길러낸 사람들도 고민은 있다. 놀랍게도 친구들의 고민은 하나로 좁혀진다.
“뭐가 맞는지 정말 모르겠어. 너무나 많은 양육법이 있는데 내 지금의 선택이 옳았는지는 이 아이가 다 자라고 난 뒤에야 알 수 있으니까 매 순간이 불안해.”
불확실성. 요즘 나는 이 불확실성 때문에 자주 초조하고 불안하다. 다음 행보를 결정하지 않고 모든 것이 열려있는 이토록 미쳐버리겠는 자유는 처음인 탓이다.
물론 창업 팀과 서비스를 만들어 나가면서 자주 느끼던 감정 역시 막막함이었다. 벅찬 만큼 아찔하게 아득했다. 광활한 지구별 위에 한 점의 티끌이 되어 서서 어디에 시선을 고정해야 할지, 그곳으로 기어가야 하는지, 굴러가는 게 좋을지 고민하고 있자면 내가 가진 자유의 크기만큼 외로웠다. 그래도 결국 남는 건 벅참이었다.
앞날을 알 수 없어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인데 그때와 지금, 달라진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멀쩡한 직장을 박차고 나와서 4050 여성 커뮤니티를 만들겠다고 요란을 떨었던 것 치고 나는 매우 안정 지향의 사람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망할 안정 지향은 대기업에서 스타트업으로, 다시 창업으로, 나를 점점 더 불안한 환경으로 이끌었다. 재밌는 건 정신 승리인 건지 환경이 바뀔 때마다 불안은 점차 낮아졌다. 오히려 자신감이 붙는 것 같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게, ‘나는 개발자다.’, ‘나는 4050 여성을 위한 커뮤니티를 만드는 사람이다.’ 정도의 굵직한 기조는 언제나 있었다. 시간이 쌓이면 자연스레 어제보다 만들 수 있는 게 많은 개발자가 됐고, 어제보다 좀 더 고객의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눈앞에 집중할 목표가 있으니, 불안은 잠깐 일었다가 금세 사라지곤 했다.
지금의 나는 내가 개발자인지, 비즈니스 하는 사람인지 뭐 하고 싶은 사람인지도 정의하지 못한 채 모든 게 가능하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뭐든 될 수 있다며 응원받는 사춘기 청소년들이 왜 날이 서있는지 알 것도 같다. 누가 결정을 대신 내려 줬으면 좋겠고 대가를 주고서라도 내 삶을 누군가에게 위탁하고 싶은 지경이다. 어지러워서 토가 나올 것 같다.
장 폴 사르트르는 불안을 현기증에 비유했다. 불안이 미래에 어떤 일이 벌어질까 봐 걱정되고 두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발을 헛디딜까 봐, 갑자기 바람이 불어 낭떠러지로 떨어질까 봐, 누군가 나타나 나를 벼랑으로 밀어낼까 봐 겁내는 것과 다르다. 불안은 그저 무엇을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는 헐벗은 마음이다. 맞은편에 다가오는 이를 내가 절벽으로 밀쳐내거나 스스로 몸을 던지거나 내가 무슨 짓을 저질러도 막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데서 오는 메스꺼움 같은 것이다. 말하자면 무한한 자유가 주는 아찔함, 어찌할 바를 모름 같은 것이다.
캄캄하고 불안한 미지 속으로 성큼 뛰어들어 부모가 된 친구들과,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열심히 세상을 두리번거리는 아이들의 조화를 보고 있자면 문득 숭고하다. 통제의 끈을 내려놓고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나 자신과 주변을 믿으며 헤쳐나가 보겠다는 겸허함이 느껴진다. 인간이기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한계를 인정한 낮은 자세가 다시 그들을 자유롭게 했구나. 충만하게 했구나. 울컥한다. 기운 내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한다. 이렇듯 부모와 아이는 옆에 앉아 보는 것만으로도 영향을 준다.
요가에 하누만 아사나라는 자세가 있다. 원숭이 자세라고도 불리는데 쉽게 설명하면 다리 찢기이다. 실제로 보면 전혀 원숭이가 떠오르지 않는 동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숭이 이름이 들어간 건 인도의 신화 때문이다.
먼 옛날 악마의 왕이 라마 왕의 아내 시타에게 반해 납치를 했다. 라마는 원숭이 왕국에 도움을 청하여 원숭이 장군 하누만과 군대를 이끌고 시타를 찾아 나섰다. 동서남북을 모두 수색하던 라마와 하누만 군대는 난관에 봉착한다. 드넓은 바다에 가로막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고민해도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군대는 눈앞에 펼쳐진 망망대해를 망연자실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 누군가 하누만 장군에게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너는 바람의 아들이다. 바람의 신처럼 숨을 들이쉬어 네 몸을 숨으로 가득 채워 보아라. 그리고 일어나 바다를 건너라.”
본인의 능력을 깨달은 하누만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다리를 길게 뻗어 단숨에 바다를 건넜다. 하누만의 다리가 닿은 곳은 스리랑카였다.
원숭이 자세는 우리가 도전에 직면할 때 발휘해야 할 용기와 헌신, 겸손을 상기시킨다고 한다. 건널 수 없을 것 같은 바다를 향해 다리를 뻗게 하는 결심은 용기만으로 생기지 않는다. 누군가를 향한 진정한 애정과 헌신, 내가 혼자서 나지 않았음을 인정하는 낮은 자세에서 온다.
나에겐 아찔한 자유와, 드넓은 바다와, 두 다리가 있다.
너에겐 용기가 있었고, 다시 생길 것이고, 너의 능력을 너만을 위해 쓰지 않을 것이다.
고로 너는 막막하지 않다.
어지러움을 모두 토하고 나면 다시 깊게 숨을 들이마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