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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닿으려는 마음

누구나 후회를 한다. 크고 작은 후회를 피부에 붙이고 산다. 하지만 난 뒤돌아보며 시간을 허비하기보다는 앞으로 나아가는 데 에너지를 쓰는 사람이니 “후회하진 않아요.”라는 말을 종종 한다. 속지 말자. 부정은 대표적인 방어기제이다.
지난주에도 후회할 짓을 했는데 뭐였더라. 그래. 고객과 동료가 함께 있는 자리에서 “종욱을 잘 활용하고 싶어요.”라는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참고로 종욱은 우리 회사 법인 대표이다. 제가 뭔데 남을 활용하고 말고 한단 말인가. 그리고 사람이 활용의 소재가 된다는 게 가당키나 한가. ‘연희동 산책을 찾는 분들이 종욱을 좋아하시니 서로 인사할 수 있는 계기를 더 자주 마련하고 싶다.’ 뭐 대충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이미 혀는 넘어진 뒤였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다가 나온 망발인지 뱉은 사람도 설명을 못한다. 구화지문(口禍之門)이라더니. 내 입을 두고 하는 말이 틀림없다. 그야말로 재앙을 부르는 문이다.
그 후로 설거지할 때도, 산책할 때도 그 순간이 반복 재생되어서 한동안 부끄러운 마음을 달고 지내야 했다. 아직도 말끔히 떨치지 못했다. 더 대단한 후횟거리가 생길 때까지는 계속 옆구리에 끼고 다니지 않을까? 잘못을 한 사람은 이렇듯 남이 벌주지 않아도 다른 방식으로 벌을 받는다. 우리는 이걸 반성이라고 한다. 자기 잘못을 아는 사람은 고통스럽다.
여기, 한 사람의 깊은 반성으로 비롯한 책이 있다. 홍영아 작가의 <그렇게 죽지 않는다>는 20년 넘게 방송 작가로 일 한 저자가 <우리는 어떻게 죽는가> 라는 다큐멘터리 취재를 계기로 자신의 커리어를 돌아보며 착오를 깨닫고 부끄러움을 고백하면서 시작하는 책이다. 그는 지난 20년간 집에 TV가 있었던 사람이라면 동고동락했을 <한국인의 밥상>, <인간 극장>, <병원 24시>, <VJ특공대>, <세계테마기행> 같은 세상과 대중을 연결해 주는 무수한 프로그램을 썼다. 재미만으로 모자라 유익하고도 감동적인 이런 프로그램에 어떤 후회의 정서가 끼어들 수 있단 말인가.
저자는 자신을 두고 공범이라는 표현을 쓴다. 잘 알지 못하는 것들을 그럴싸하게 포장하여 격한 감정을 끌어내는 데 신경 쓰느라 시청자와 방송에 협조하는 이들의 올바른 판단을 막는 데 일조했다며 통탄한다. 그 주제가 하필 죽음이라 저자는 더 아프다.
저자의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말기 암 환자의 항암제 사용량은 선진국의 3배에 달한다. 대한민국 국민은 평생 써 온 의료비의 2배를 죽기 전 한 달 동안 소진한다. 마약성 진통제 사용량은 선진국의 10% 수준이다. 말기 암 환자의 소생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그는 의사로부터 기적이 일어난다면 유일한 가능성은 오진뿐이라는 인터뷰를 따냈다. 그러니까 종합하면 우리나라 말기 암 환자의 상당수는 죽음을 예약해 두고도 평생 사용할 의료비의 2/3를 태워 항암치료를 받고, 진통제 없이 고통을 호소하다가 이승과의 제대로 된 이별 준비도 못하고 저승으로 가는 것이다. 의료진과 환자와 보호자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도 종국엔 전원 다 너덜나버린다. 당연한 결과다. 패배가 확실한 전쟁에 뛰어들면 돌아오는 건 패배이다.
홍영아 작가는 이러한 아이러니를 낳는데 자신이 만든 방송이 역할을 한 것 같다며 뒤를 돌아본다. “엄마는 포기할 수 없다.” “아빠는 끝까지 힘을 내려 한다.” “딸은 최선을 다한다.” 희망이 없는 자리에 희망을 들먹이며 온 가족이 환자를 낫게 하는데 돈과 시간과 힘을 모으고, 환자는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여생의 질을 포기할 것을 종용하는 글들을 써 내려갔노라고 자책한다.
키이라 나이틀리와 제임스 맥어보이 주연, 이제는 믿고 보는 배우가 된 시얼샤 로넌이 아역으로 등장한 영화 <어톤먼트>. 영화의 원작인 이언 매큐언의 소설 <속죄>는 한 소녀의 천진한 오해가 부른 어이없는 사건을 통해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폭력의 여러 양태를 다룬다. 그 출발에는 착각이 있다. 소녀 브리오니의 잘못된 해석이 담긴 말 한마디로 인해 누군가는 감옥과 전쟁터를 거쳐 죽음에 이르고, 친언니는 가족과 단절하며, 이제 막 불타오른 연인은 생이별한다. (이거야말로 구화지문인가.)
브리오니는 열세 살에 자신이 만든 이 사건과 여파를 그린 글을 평생에 걸쳐 고쳐 쓴다. 자기 잘못으로 영향을 받은 이들의 삶에 이미 벌어진 일과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가능성을, 일생을 바쳐 추측한다. 그들에게 가닿으려는 마음을 담은 글은 나아갔다 지워지기를 반복하며 기십 년 동안 다시 쓰인다. 당신이 어떤 글을 읽고 감동한다면 진짜 이유는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구체적인 상상이 빈약한 글은 조금의 근사함도 만들기 어렵다.
소설에는 없지만 영화에만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세실리아(키이라 나이틀리)가 뛰어들었다가 떠난 분수 앞에 홀로 남은 로비(제임스 맥어보이)가 수면 위에 손을 가져다 대는 신이다. 나는 로비가 분수 물의 온도를 가늠했다고 해석한다. 자신과 실랑이를 하다가 물에 빠져버린 세실리아가 혹시나 추웠을 걸 염려하는 마음이 수면에 닿을락 말락 하는 그 손바닥에 매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책하고 있다.
죄의식 또한 상대가 되어보려는 시도가 있을 때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것임을 소설은 말해준다. 누군가의 입장을 헤아리고 아무도 지우지 않은 책임을 스스로 느낀다는 점에서 그것은 사랑의 모양과 유사하다.
유레카! 앎은 기쁨의 원천이다. 아르키메데스가 순도 100%의 금을 발라낼 방법을 깨닫고 욕조 밖으로 뛰쳐나오며 외친 그 말에 슬픔이 깃들었을 리 없다. 하지만 어떤 깨달음은 상흔을 남긴다.
홍영아 작가는 책을 완성하기까지 8년이 걸렸다고 했다. 나는 그가 단지 일상을 충실히 보내느라 여유가 없어서 이 책을 엮는데 8년이라는 시간을 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각 장의 제목에서 그의 주저함을 느낀다. 생각보다 이른, 생각보다 느린, 생각과 다른, 생각만큼 모르는, 생각해 보지 못한, 생각은 참.
내가 정말 잘못 말해 온 것인가? 정확히 무엇을 잘못 말했나?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인가? 어떤 것이 현실적인 죽음이고, 그럼 이상적인 죽음도 있나? 그는 자신에게 묻고, 죽음 앞에 선 당사자에게 묻고, 죽음을 목도한 사람들에게 묻고 또 묻는다. 책은 8년 치 번뇌의 축약이다.
누구나 후회를 한다. 크고 작은 후회를 피부에 붙이고 산다. 어떤 계기로 몸에서 떨어졌다 다시 붙었다 하지만, 말끔하게 뗄 순 없다. 때를 지나치게 벅벅 밀면 살갗이 벗겨지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우리는 후회하는 어깨를 두고 깊이 뉘우치라는 권유 대신 “너무 후회하지 마. 다들 그러면서 살아.”라며 다독인다. 혹시나 그이가 피가 날 정도로 후회를 씻어내고 있을까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