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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보가 아니라 소통입니다

3월, 한국 경제에서 종이 신문을 구독하기 시작했다. 많은 신문사 중 한국 경제를 고른 이유는 간단했다. 대학원생에게까지 할인해주는 유일한 신문사였다. 무려 반값이었다. 내게 뉴스는 언제인가부터 매우 능동적으로 소비해야 하는 컨텐츠가 되었는데, 집에 TV도 없다 보니 우연히 마주칠 기회조차 생기지 않아 세상과 동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아날로그로 돌아가 보기로 한 결정이었다. 책은 내가 어렴풋이 느꼈던, 또는 세상살이에 무관심한 내 탓으로 돌렸던, 뉴스가 매우 능동적으로 소비해야 하는 컨텐츠가 된 시점과 이유를 상세하게 설명해줬다. 우리는 양질의 뉴스를 우연히, 일상적으로 만나기 어려워졌다.
이틀 전 4월 25일, 신문 구독을 해지했다. 두 달 만에 신문 읽기 프로젝트는 끝이 났다. 종이 신문을 대강이라도 살펴보는 데는 최소 30분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는데, 바스락거리고 폭이 넓은 신문을 방해 없이 읽을 30분이 잘 나지 않았다. 신문의 물성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지만 내 몸이 익숙해하는 도구가 모바일과 디지털로 옮겨왔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리고, 음. 재미가 없었어. 학부 4년 동안 꾸준히 읽던 그 신문과 무엇이 달라졌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이것 역시도 내가 달라졌겠지. 다만 신문 구독을 해지하면서 '뉴스를 어디에서 무엇으로 소비해야 하나' 하던 고민이 부메랑처럼 돌아왔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흡수하기도 충분히 벅찬 다변화 시대지만 내가 속한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모르는 채로 지내도 정말 괜찮은 걸까 의문스럽다.
한국 음식점 검색과 쇼핑 외에는 국내 포털을 이용하지 않은 지 여러 해다. 심지어 구글 검색창에 한글을 입력하는 일도 드물다. 나는 주로 구글에 영문을 input으로 넣고 영문으로 output을 받아 흡수하며 인터넷과 소통한다. 영어가 제1 컴플렉스인 사람이라 더 아이러니다. 이유는 양질의 컨텐츠가 국문으로는 잘 탐색되지 않고 영문일 때 건질 게 더 많아서인데 소비할만한 모국어 컨텐츠가 점점 줄어든다는 게 묘한 불안감을 준다. 영어를 잘 읽고 쓰는 사람은 더 좋은 정보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지만, 충분히 교육받지 못 한 사람은 스스로 느낄 겨를도 없이 정보 격차를 경험할 거라는 그림이 재생된다. 이제는 조금 낡은 단어가 되었지만 정보화 시대의 권력은 정보가 아니던가. 사실 정보화 시대가 오기 전부터 정보는 인류가 탄생한 이래로 계속 권력이었다.
민주주의가 빠지기 쉬운 오류 중의 하나가 다수결이라고 했다. 모두가 정보 제공자가 될 수 있고, 인플루언서가될 수 있는 web에서도 다수결은 오류가 될 수 있다. 다수가 틀린 정보를 재확산하고, 단 한 명이 진실을 말할 때 우리는 web에서 틀린 정보만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를 검증해줄 것은 오로지 자신 뿐이다. 언젠가 친구가 웃긴 거라며 사진 한 장을 보내준 적 있다. 영화배우 장첸을 검색하면 윤계상이 나온다는 건데, 영화 범죄도시에서 윤계상이 맡은 극 중 이름이 장첸이었다. 정확한 한 줄의 정보 보다 틀린 정보의 양이 월등히 많으면 사실로 오인할 수 있다. 정말 이 모든 검증과 판단을 개인에게 돌려야 한단 말인가.
쓸만한 정보와 정확한 사실을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돕는 것. web과 디지털의 주요 기능이었던 것이 그 덩치가 비대해지자 역으로 자기 기능을 위협하는 결과를 맞이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현재진행형이 아니던가. 문제를 인지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것을 고쳐나갈 여력이 우리에게 아직 있음을 의미한다. 마음 놓고 신뢰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 정말 불가능할까?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어떤 종류의 격차’(정보, 세대, 디지털 리터러시, …), ‘환경 문제’, ‘소외’를 해소해 개개인의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게 나에게 중요한 미션임을 깨달았다.
라는 지난 독후감의 다른 버전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