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망의 죽음과 자본주의의 미래

중년 여성을 만나면 덮어놓고 마음이 친절해지는 편이다. 가끔 만나는 억척스러움도 그가 보낸 세월이 묻어나 나름의 귀여움이 있고, 30여 년밖에 안 산 내 머리에서는 나올 수 없는 사려 깊음과 배려는 감동을 넘어 감격스럽다. 물론 좋아한다고 마냥 편하다는 것은 아니다. 중년과의 대화는 에너지 소모가 크다. 왜 인지는 비밀이다. 여러분들 모두 엄마, 아빠와 대화해보지 않았나. 껄껄. 뭐 그런 거다. 그래도 애틋한 눈으로 바라보게 되는 주름이 정겹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아도 주름의 주인은 나보다 더 나를 애정이 어린 눈으로 바라봐주므로. 코로나가 극심하던 때에 중년과 깊은 대화를 주기적으로 나눌 기회가 있었다. 집에서 머나먼 송파 롯데백화점 문화센터에서 독서 모임 운영 제안을 받았는데 제일 먼저 떠올랐던 건 중년 여성을 만날 기회라는 생각이었다. 대한민국 국민의 50% 가까이 차지하는 4-60대이지만 함께 대화할 일이 드물다. 대화만? 스칠 일도 없다. 내가 좋아하는 한남동, 연희동 거리에는 대한민국 인구 구성 중 25%를 차지하는 2-30대만 걸어 다닌다. 인구 절반이라는데 다 어디 계시는 거지. 내가 속한 준거집단이 IT 업계 스타트업이라는 비교적 젊은 조직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대한민국 절반의 삶이 어떤지 상상만 해볼 뿐 구체적인 생활과 일상, 생각, 가치관은 모른다고 보는 게 맞다. 그래서 어떤 연유와 기대로 문화센터 독서 모임에 오셨는지 이야기 듣고, 함께 토론했던 시간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아마도 중년 여성의 모든 시기가 내 어머니의 과거와 현재처럼 느껴져서일지도 모른다. 사랑을 주고받았던 기억은 이렇게 나와 전혀 상관 없는 타인과도 유대감을 형성해준다. 우리는 중년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조건과 환경, 연령의 개인을 한데 묶어 부른다. 문화센터 모임을 계기로 주변의 소개를 받아 몇몇 중년의 어른들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요청은 내가 했는데 한 사람당 약 2시간 정도 소요되는 인터뷰 동안 한 분도 빠짐없이 내게 차나 밥을 사주셨다. 그리고 한 가지를 배웠다. 우리가 마치 동질 집단인 것 처럼 부르는 중년 카테고리 안에는 한창 활발히 경제활동을 하는 연령, 은퇴 전, 은퇴 후, 고등 교육 수료자, 미수료자, 자녀의 유무, 그중에서도 교육기 자녀의 유무, 배우자의 유무, 경제적 여건에 따라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간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이다. 가정을 개인으로 바꾸어도 의미는 통한다. 나이가 어린 개인도 나이가 많은 개인도 행복의 조건은 크게 다르지 않다. 1) 신체의 건강 2) 친밀한 관계 3) 환경과 경제적 안정 4) 적당한 루틴 5)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을 거라는 또는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 물론 이 다섯 가지 행복의 조건은 공신력이 없다. 김선미 피셜이므로. 어쨌든 중년이 불행의 사이클을 타기 시작하면 좀 더 절망적인 이유는 지금의 자리가 앞서 살아온 자기 삶의 결과라는 인식과 평가, 건강의 약화와 함께 여생이 줄어드는 것이 체감되기 시작하는 시기로, 오늘 아무리 움직여도 미래에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어내기 어려울 거라는 무력함이 기저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성장 곡선이 둔화하면서 긍정적인 기대와 희망이 줄어든 요즘의 시대에 청년들이 열정적으로 삶을 꾸리기 어렵다는 말은 중년도, 노년도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에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 오히려 경제적, 심리적, 신체적 안정을 취하지 못한 중년은 청년보다 더 위태로울 수 있다. 청년은 나라와 지구의 미래이기에 좀 더 많은 지원과 주목을 받고 있으며, 저성장 시대에 태어나 어릴 때부터 개인마다 다른 행복을 추구하는 연습을 해왔다. 하지만 지금의 중년은 그런 연습을 해본 적이 없으며, 행복한 중년과의 격차는 청년보다 더 큰 폭으로 벌어졌고, 청년보다 비교적 낮은 온도의 사회적 시선을 감당해야 한다. 책은 미국의 특정 연령층(우리가 중년이라고 부르는)에서 우울증, 자살, 알코올 중독, 약물 중독, 심장마비 등으로 사망하는 비율이 눈에 띄게 커지고 있으며, 각자 다르게 인식되는 사인들이 사실은 절망사(절망으로 인한 사망)라는 한 카테고리로 묶어 해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노동의 가치가 줄어든 현대 기업의 지배구조, 단발적인 사회 복지, 의료 시스템 등을 개선하기를 권고한다. 이런 거대 담론을 당장 현실화하기는 어렵다. 국가와 정치, 사회가 변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분명 다양한 측면에서의 고민이 필요하고 그 고려를 선별해 반영하려면 긴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넋 놓고 기다리기엔 시계는 성실히 째깍째깍 돌아가고, 우리는 나이 들고 오늘도 우울증과 각종 중독으로 수십만이 사망했다. 지금 당장 절망사 절벽에 선 이들의 발걸음을 돌릴 순 없다. 하지만 불행에도 전염이 있듯이 행복에도 전염성이 있다고 믿는다. 스스로 행복한지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이 확실한 행복을 느낀다면, 그걸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도 행복을 꿈꾸기 쉬워진다. 인터뷰가 끝날 때마다 어른들은 표현만 다를 뿐 공통된 말씀을 해주셨다. “고마워요. 상담받는 기분이었어. 아무도 나에게 나에 대해 이렇게 깊이 있는 질문을 해준 적 없는 것 같아. 심지어 나조차도. 오늘 생각이 많은 밤을 보낼 것 같네. 긍정적인 의미로. 또 만나줘요.”